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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및 초기 교회사에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감리회(미국 북감리회) 파송을 받아 1885년 조선 땅을 밟았으며,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인재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헨리 아펜젤러의 생애 주기와 조선 입국 배경, 배재학당의 구체적인 설립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사실에 기반하여 객관적으로 살펴봅니다.
1. 헨리 아펜젤러의 성장 배경과 선교사 헌신

2. 신앙적 배경과 학문적 훈련 과정
헨리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서더턴에서 독일계 개혁교회 전통을 지닌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적 훈련 속에서 자란 그는 프랭클린 앤 마셜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 재학 시절 감리교회로 소속을 옮기며 깊은 영적 체험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드루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해외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고, 당시 문호 개방을 시작하던 조선(은자의 나라)을 향한 파송 요청에 자원했습니다.
3. 조선 파송 결정과 1885년 제물포 입국
아펜젤러는 신학교를 졸업하던 1885년 1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엘라 도지(Ella Dodge)와 결혼한 직후 곧바로 선교지로 출발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부활절), 그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1884년) 직후의 불안한 정국으로 인해 외국인 거주가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정세를 살핀 뒤 1885년 7월 정식으로 한양(서울)에 정착했습니다.
4. 배재학당의 설립 과정과 초기 발전

5. 작은 방 두 개에서 시작된 근대 교육
한양 정동에 터를 잡은 아펜젤러는 정부의 선교 불허 방침에 따라 직접적인 복음 전도 대신 교육과 의료 중심의 간접 선교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는 두 명의 학생(이겸라, 고영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한국 근대식 사립학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서당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서구식 근대 학문(영어, 지리, 역사, 수학 등)을 교과목으로 도입하며 체계적인 수업을 전개했습니다.
6. 고종 황제의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 하사와 공식 승인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자 아펜젤러는 조선 정부에 학교 설립의 공식적인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1886년 6월 8일, 고종 황제는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을 담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학교 이름을 하사하고 현판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배재학당은 조선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서구식 근대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신분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개방했습니다.
7. 배재학당의 교육 이념과 역사적 영향력

8. ‘섬김의 리더십’과 협성회 조직

배재학당의 교육 이념은 마태복음 20장 26~28절의 정신을 담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欲爲大者 當爲人役)”였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주적 시민 의식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을 지향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6년 한국 최초의 학생 자치 토론회이자 계몽 단체인 협성회(協成會)가 결성되었으며,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 근현대사를 이끈 핵심 인물들이 배재학당을 거쳐 성장했습니다.
9. 문서 선교와 한글 보급을 이끈 삼문출판사
아펜젤러는 근대적 인쇄 시설인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를 배재학당 내에 설치하여 활발한 출판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삼문출판사는 성경 번역본과 기독교 문서를 인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인 독립신문과 대한그리스도인회보를 발행하는 기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초기 한국 사회의 문맹 퇴치와 한글 전용 문화 확산에 결정적인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0. 아펜젤러의 후기 사역과 순직

11. 성경 번역 사역과 정동제일교회 설립
아펜젤러는 교육 사역 외에도 188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베델예배당)를 개척하여 초대 담임목사로 사역했습니다.
또한 성경번역자회(Bible Translators Board)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신약성서의 우리말 번역 작업에 핵심적인 공헌을 남겼습니다.
그는 서양 학문과 기독교 복음이 조선의 주체적인 발전과 결합할 수 있도록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12. 1902년 어청도 해상 사고와 희생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던 중 충청남도 보령시 어청도 인근 해상에서 선박 충돌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당시 그는 자신만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했던 한국인 조수(조성규)와 여학생을 구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향년 44세의 나이로 순직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못했으나,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그의 헌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13. 자주 묻는 질문

14. Q1. 헨리 아펜젤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입국 시기와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A1. 두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같은 배(치토세마루호)를 타고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아펜젤러는 감리회, 언더우드는 장로회 소속으로 교파는 달랐으나 한국 초기 선교 및 성경 번역 과정에서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15. Q2.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나요?
A2. 1886년 6월 8일 조선의 국왕 고종이 직접 '인재를 양성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학교 이름을 하사하고 현판을 전달했습니다.
16. Q3. 배재학당의 교육 이념은 무엇이었나요?
A3. 배재학당의 당훈은 성경 마태복음 말씀을 바탕으로 한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欲爲大者 當爲人役)"였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섬김의 자세를 갖춘 자주적 근대 인재 양성을 핵심 목표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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